독살이란?
학계에서는 이를 석방렴(石防簾)이라고 부르는데 그 음(音)을 따서 "독살", "독발", "돌발"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독살은 "밀물 때 물의 흐름을 따라 들어온 물고기가 물이 빠지는 썰물 때 그 안에 갇혀 나가지 못하게 되는 원리를 이용한 어로법이다.”인간이 원하는만큼 잡는 고기잡이와 자연이 주는 대로 받는 고기잡이, 이렇게 고기잡이를 두 부류로 나눈다면 독살은 후자에 속하는 자연의 이치에 따른 어로법이다.
어살에 대한 기록중 가장 오랜 된 것은 고려 인종23년(1145년)에 펴낸 (삼국사기) 까지 거슬러 올라 "중국 수나라 양제의 제2차 고구려 원정에 관한 기록 중 어량(魚梁)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고 학자들이 밝히고 있으나, 그 형태로 보아 이미 원시시대에 등장한 어법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후 (고려사) 에도 1016년에 현종이 왕자에게 내린 하사품중, 금,은,비단이며 토지와 염전 등과 함께 이 "어살"이 오르기도 했다. 독살은 한번 쌓기만 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큰 경제적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많은 인력과 돈을 투자해서라도 독살을 소유하기을 원했고 이로 인해 자연적 여건이 잘 갗추어진 서해안 지방에는 많은 독살이 쌓여지게 되었다. 15세기에 펴낸 (세종실록지리지) 에 따르면 황해도 127개, 충청도에 136개, 전라도에 50개, 경기도에 34개 경상도에 7개, 함경도에 2개의 어살이 설치돼 있었다. 특히 황해도 강령만과 해주만, 충청도의 천수만, 경기도의 경기만과 남양만 등 서해안 일대에서 발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해안은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독살을 설치 하기가 수월한데다 물고기의 산란장 역할을 하는 개펄이 넓게 형성돼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최대의 시장인 한양이 가까이 위치해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무려 1000년이 넘도록 어이온 어로 수단이던 독살이 쇠락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기부터다.
대형 어선에 의한 그물 어업이 발달하고 외국의 각종 어로 장비와 어법(漁法)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 때까지만 해도 서해안을 중심으로 여전히 많은 독살이 설치돼 있었다.
이렇게 옛 기록에서나 듣던 독살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조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얼마나 신비스런 일일까?
현재에도 태안군 일대엔 수많은 독살이 남아 있는데, 특히 안면도의 밧개, 근흥면의 마도, 소원면의 개목, 원북면의 안뫼, 이원면 의 사목 등은 지금까지 형태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에 의아심을 자아낸다. 하지만 날마다 독살을 살펴 보는 주인이 없어 그저 허전함을 느낄 뿐이다.
(독살체험모습) (물이빠진 독살모습)